대나무 숲에 부는 바람
[홍순천의 ‘땅 다지기’(56)] 진안 봉곡마을

등록일 : 2018/06/14 07:14  편집부 기자   
 
(그림=홍순천)

여름으로 넘어가는 유월 아침, ‘대고개’에는 오월의 산고를 거친 대나무 숲이 쑥쑥 자라고 있다. 새 식구들에게 자리를 내준 숲 사이로 잎이 채 피지도 않은 연약한 몸피를 지탱하는 어린 순이 곧 쓰러질 듯 위태롭다. 바람이 불면 금방 꺾어질 듯 연약하지만 피폐해진 목숨을 아끼지 않는 묵은 대나무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후대를 위해 기꺼이 버팀목을 자처하는 묵은 대나무 덕에 빛바랜 숲이 든든하다.

대나무는 일부러는 키우기 어려운 식물이다. 어렵사리 뿌리를 옮겨도 조건이 맞지 않으면 살지 못하지만, 오랜 세월을 두고 스스로 터를 마련하면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생명력을 떨친다. 오랜 기다림 끝에 자리를 확보한 대나무 숲은 끈질기게 용기를 주는 등불처럼 당당하다. 오월이 다 지나도록 시들시들하던 대나무 숲이 오랜 기다림을 뚫고 한순간 키워 올린 새순은 한 달 만에 하늘에 닿을 만큼 커버린다. 놀라운 생명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겐 오랜 시간을 두고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던 일이 있었다. 나라를 잃고 파도에 일렁이는 난파선의 파편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한 자존심을 되찾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대로 몸을 뒤척일 수밖에 없는 파도처럼 뭍에 닿을 수 없는 갈증이 백년 넘게 이 땅을 괴롭혔다. 역사의 폭력이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3대에 걸친 라틴아메리카의 고통을 마르께스(Gabriel García Márquez)는 ‘백 년 동안의 고독’을 통해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우리에게도 백년 넘게 쌓인 고통과 고독은 삶의 한 부분처럼 그저 당연하게 치부된 세월이었다. 숨 막히게 조여 오는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저 숨만 쉬고 살아 왔던 넌덜머리나는 세월이 그새 백년이 되었다.

어제, 오랫동안 독재를 고집해온 사람들이 놀라 자빠질만한 일이 벌어졌다. 숨통을 조이고 자기 마음대로 잘라 지지고 볶아 요리하던 사람들은 싱가포르에 온 관심을 기울였다. 제 밥그릇 챙기기에만 눈이 벌개졌던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뒤집히는 혁명쯤으로 보였을 것이 뻔하다. 지난한 전쟁을 마치고 평화롭게 살자는 선언이 아직 섣부른 기대일 수도 있지만, 목을 죄고 협박하던 역사의 손길로부터 속 시원히 숨통이 풀려난 사건인 것만은 분명하다. 역사를 외면하고 힘 센 칼자루에 편승해 제 밥그릇만 챙기던 사람들은 오히려 목이 탈만한 일이다. 그저 자연스럽게 세월이 흘러서 만든 결과는 아니다. 부채 하나로 채근한다고 대나무 숲에 바람이 불지는 않는다. 오랜 노력과 기다림의 결과다.

나누고 배려하는 대나무 숲은 이즈음에 몹시 빛나는 공동체다. 한 달 만에 다 자라는 대나무는 제 몸을 스스로 가누지 못한다. 바람만 불어도 몸을 누이는 풀잎처럼 연약하지만 말없이 어깨를 내주는 동료들의 배려와 희생으로 건강한 숲을 이뤄낸다. 유월이 지나 비바람 몰고 오는 장마를 견뎌내기 위해 어깨를 걸고 도닥이며 생명을 일궈가는 대나무 숲에게 배울 일이다. 북한과 미국이 한 자리에 앉기까지 그 자리를 만든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목소리만 높이며 눈앞의 이익만 쫒아가는 사람들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오래 준비하고 기다린 사람만이 진짜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고향의 산과 들에는 소나무만 드문드문 서 있었다. 그 사이를 흐르던 마사토에서 화약 냄새만 진동했던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처음 만난 남도의 대나무 숲은 오랫동안 충격으로 남았다. 대나무 숲은 경이로운 존재였다. 해질 무렵 불어오는 바람에 일렁이며 속삭이던 숲에는 잠자리를 준비하는 온갖 새들이 자글자글 끓었다. 그 생명의 아름다움은 걷잡을 수 없는 바람처럼 평생 동안 머릿속을 끈질기게 관통했다. 유월, 아름다운 생명의 잔치가 시작되었다. 바람이 불어와 몸을 굽힐지라도 어깨를 빌려주는 대나무 숲처럼 살아볼 일이다.

진안에서 무주를 넘는 ‘대고개’, 대나무 숲에 바람이 여전해도 마음은 든든하다. 대나무를 베어 만든 만파식적(萬波息笛)에 대고 막힌 숨 토해내고 싶은 유월이다.

 
▲끈끈이대나물이 끈질기게 피어나는 유월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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