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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평전>으로 재현한 시인 윤동주

문다정(전북대 국어국문학과 3학년)

편집부 기자 (2017년 05월 26일 15시)


(사진=문다정)

스물일곱, 시인 윤동주와 독립운동가 송몽규가 작고할 당시의 나이. 그들의 생애대로라면 삶의 말년을 보내는 중이었던 나는 그들만큼 시를 창작하는 등의 생산적인 활동도, 역사에 뜻을 남기는 등의 유의미한 활동도 일절 없이 지내고 있었다. 오히려 시험을 위해, 과제를 위해 의무적으로 시를 읽고, 시어를 외우고, 책으로 애국을 배운 것이다. 그들의 흔적을 찾아 중국 용정에 다녀오기 전까지 말이다. 중국을 다녀오고 윤동주와 송몽규의 발자취만으로 생각이 바뀐 나는 나름대로 사료조사도 하고, 용정 현지에서 관련자(명동촌 관리인)와 만남도 가지며 시인 윤동주를 직접 느끼고자 했지만 그의 미약하게나마 흔적이 남은 길을 따라 걷거나 그 길을 관리하는 중국의 태도만 목격할 수 있었을 뿐, 살아있는 자료는 볼 수 없었다. 그 갈증을 채워준 것이 실제 주변인들의 증언을 채록한 이 책이었다. 오늘 글은 인간 윤동주를 알았던 여러 사람들의 기억을 담아낸 <윤동주평전>, 그것들로 송우혜 저자가 생생하게 재현해낸 인물들에 대해 쓴다.

(1) 윤동주의 재현

숭실학교는 참배 대열의 맨 꼴찌였다. 계단의 한가운데쯤 올라갔을 때였다. 당시 5학년이던 학생장 朴仁植 형이 갑자기 “제자리 서” “뒤로 돌아”라고 고함쳤다. 학생들은 마치 일시에 전류가 통한 듯 “와”하는 함성과 함께 그대로 돌계단을 뛰어내려오고 말았다. 그것은 이심전심의 무서운 결속이었다.(187쪽)

숭실학교 3학년 재학 당시 윤동주와 같은 반이었던 김두찬(1920년생)이 1982년 ‘혹독했던 신사참배 강요’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남긴 증언이다. 책에 따르면 윤동주는 신사참배 강요를 이유로 숭실중학을 자퇴할 적에 그가 일본에게 했던 ‘몸으로 말하는 저항의 외침’은 자퇴 사건이 유일한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일본 천황이 아들을 낳았다고 신궁에 가서 참배할 것을 강요받았을 때, 몸으로 행동했던 한 가지 사건이 더 있었던 것. 비록 그 뒤로 ‘조지 S 매퀸’ 교장(한국명 尹山溫)은 다음 해인 1936년 1월 20일 파면되었지만, 아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사실 윤동주를 포함한 모두가 한 마음이었단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던 일화였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책은 한국, 중국, 일본 곳곳에 잠들어 있던 증언이나 사진, 판결문 등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다양한 자료들을 교포나 일본인 연구가, 일본 국회도서관의 입을 빌려 기술해놓았는데, 덕분에 조국 뿐 아니라 시를 생각했던 시인 윤동주의 일생과 자세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특히 「팔복」 육필 원고를 들여다 볼 때에는 퇴고 흔적이 그대로 남은 원고를 그림 자료로나마 볼 수 있어 좋았고. 시구를 고치는 과정을 추측해 저자가 이렇게 고쳤을 것이다, 이런 의도로 썼을 것이다, 후술한 부분이 있는데, 그를 바탕으로 이 시 구절은 이렇게 탄생했겠구나,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팔복」이라는 작품에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의 과정이 어떻게 전개됐는지, 시인은 어떻게 이 시를 완성했는지 상세히 볼 수 있어 새삼 내 전공을 통해 작품을 창작할 때 나는 어떻게 했는지 되짚어 보기도 했다.

이렇게 탄생한 시는 그의 생애를 함께 떠올리며 읽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열아홉이라는 나이를 누리는 학생이 당연히, 충분히 가질 법한 세계에 대한 동경과 선망, 그러면서도 당연하지 않은 바깥의 세계가 빚어낸 암울한 사회상으로부터의 좌절감과 탄식들이 시에 그대로, 함께, 동시에 녹아난 듯해 안타까웠다.

숭실중학 사건도 그렇고 송몽규나 윤동주가 조국을 위해 김구선생을 찾아가고 우리말로 시를 쓰는 등 한참 행동으로 나섰을 때의 시기는 우리 나이와 비슷한, 어쩌면 더 어렸던 시기였는데 그들의 행동을 보면 지금의 10대, 20대가 아닌 그 이상 나이 때의 무척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철이 일찍 든 것일까 생각했는데, 그런 와중에도 숭실중학 재학 당시 문익환 목사가 ‘반듯한 내 모자로 바꿔 쓰고 사진을 찍고 싶으면 동주 네가 나에게 호떡을 사 내라’, 하여서 냉큼 사주고 모자를 바꾸어 쓰는 등 평전 속에 종종 등장하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그 나이 때 소년의 느낌을 준다. 이렇게 어리고 평범했던 청년들이 시대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야 했을 정도로 불운한 때였다는 것이 읽을수록 안타까움을 더했다.


▲중국 연변 용정의 대성중학교. 윤동주 시인이 다닌 은진중학교가 나중에 대성중학교로 통합됐다.

그런데 평전에서 다소 아쉽게 다뤄진 부분이 하나 있는데, 바로 동지사대학 이야기다. 저자는 경도에 위치한 동지사대학을 언급할 때, 경도에 대한 인연은 추측했지만 수많은 대학 중에서도 굳이 동지사대학을 선택한 윤동주 시인 개인의 이유를 별도로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경의 입교대학에서 경도의 학교로 편입할 곳을 선택하는 데 송몽규가 재학 중이었던 경도의 경도제국대학이나 연희전문 시절 가장 존경했던 스승 이양하가 졸업한 동경제국대학이 아닌, 왜 동지사대학이었을까? 동지사대학은 유서 깊기로는 비록 사립 중에 최고라고는 해도, 임금이나 대우는 제대는커녕 일본고등학교보다 못했는데……. 추측하건대 동지사대학에의 진학 결심이 처음 든 것은 정지용 시인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읽으면서 경도에 대해 이야기 듣기는 이양하 선생님께 많이 들었더라도, 책에서 언급된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동지사대학과 인연이 닿는 사람은 정지용 시인(동지사대학 졸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윤동주와 그의 주변인들이 좋아했던 경도라는 도시에서 선망하는 시인이 다녔던 학교에서 그가 배운 것을 배우며 또다른 시인 윤동주는 더 나은 시를 쓰고 싶었는지 모른다.

(2) 강처중, 고희욱의 재현

이 책의 의의는 사람들의 증언을 채록해 책으로 문서화한 것도 있지만,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던 주변 인물에 대해 주목하고 한 장 이상을 소비하여 그들의 흔적 또한 책에 남기고자 한 것도 있다. 특히 강처중과 고희욱에 대해서는 원고를 가지고 있다가 세상에 출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알려진 후배 정병욱에 비해 훨씬 정보가 부족한 상태였던 터라, 더욱 의미가 있었다. 원고를 갖고 있던 사람은 여동생 윤혜원 씨나 후배 정병욱 만인 줄 알았는데, 강처중 또한 4년이 넘도록 시를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지금은 보호받고 있는 그의 책과 앉은뱅이책상 등 제법 부피가 있는 유품들 또한 보존하고 있었고, 시집 출판에까지 큰 힘을 썼다. 경향신문 기자였을 적 윤동주 시인이 평생에 걸쳐 좋아했던 정지용 시인에게 서문을 부탁하고, 실제 시집 출간을 이룩해냈으며, 발문까지 써 주어 신인이었던 윤동주가 세상에 알려지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즉 강처중이라는 인물의 재발견인데, 이 책으로써 비로소 강처중 또한 세상에 알려지고 그간 해온 행동들이 빛을 보게 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강처중(왼쪽.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과 송몽규(연희전문학교 시절)

고희욱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사실 기행을 다니며 방문했던 국내·외 현장에서 한 번도 이름을 마주치지 못했을 정도로 정보가 없고, 때문에 몰라 뵈었던 명사다. 사실 강처중은 이후 《동주》라는 영화에도 등장하고, 윤동주에 대해 깊이 알아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정병욱 다음으로 정보를 얻을 경로가 많았던 인사였다. 하지만 고희욱은 그렇지 못해 책으로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여기서 기술하기로는, 경도에서 조선인학생민족주의그룹사건이 터졌을 때, 윤동주와 송몽규 외에 유일하게 검사국(검찰청)에 송국됐던 사람이라고 했다. 비록 일본인 경찰이 제3고등학교(경도의 명문 고등학교, 약칭 삼고) 선배인 덕택에 불기소 처분을 받고 석방되긴 했어도, 사상범 최고형인 2년을 받았던 윤동주, 송몽규와 함께 송국됐을 정도로 민족의식만큼은 뚜렷했던 사람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보통학교 때부터 일제 교육을 받아 한국어를 듣고 말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어도 쓰는 것을 유독 어려워했던 인물이었는데 일제에 순응하지 않고 하숙집에 들어온 송몽규에게 자신은 연극에 투신하여 민족문화운동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등 조국과 민족운동에 대해 순수하면서도 확고한 방향성을 갖고 있었던 어린 스무 살 청년이었던 것이다.

1942년 징병제 얘기가 처음 나오고, 1943년 본격적으로 시행된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윤동주와 송몽규는 오히려 반색을 했다고 한다. 무수한 조선의 죄 없는 목숨들이 일제의 총알받이로 전락하는 것에 당시 매우 분노했던 조선인들과 달리, 조선 독립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역이용할 수 있는 제도라고 생각한 것이다. 덧붙여 무기교육이나 군사지식을 체득한 적 없던 조선 사람들에게 징병제도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책은 전하는데, 그날 그들의 행동과 마음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수립에 닿아 힘을 보탠 듯 든든하다. 이렇게 책에서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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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사 : 윤동주의 빛 걷어내기
김주휘(전북대 신문방송학과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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