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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lan ]

소소한 노래, 큰 노래

[홍순천의 ‘땅 다지기’(34)] 진안 봉곡마을

편집부 기자 (2017년 08월 24일 01시)


(그림=홍순천)

밤새 잔디에 내린 이슬이 발끝에 채이고, 새벽부터 풀숲에서 노래를 부르는 귀뚜라미가 산골을 가득 채운다. 처서(處暑)는 늦더위가 물러나고 벼가 익어가는 시절이다. 반바지를 입어 드러난 종아리를 사정없이 물어뜯는 모기도 이젠 입이 삐뚤어져서 잠잠해지는 시기라 했다. 염치없이 피를 빨아대는 모기도 이젠 귀뚜라미가 부르는 노래에 자리를 내주고 물러날 시기다.

귀뚜라미는 이 시기에 제일 소란스럽다. 부지런히 짝짓기를 하고 내년을 준비하는 동안 그들은 '나, 여기 아직도 살아있노라'고 끝없는 신호를 세상에 보낸다. 사랑을 구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우리 삶과 다르지 않다. 아파트를 짓느라 뭉개진 고향의 뒷동산은 소년기를 보듬어 주던 요람이었다. 학교를 마치기 바쁘게 늘 기타를 들고 찾아간 곳은 뒷동산이었다. 귀뚜라미가 노래를 부르듯, 손끝에 물집이 잡히도록 기타를 두드리며 목청껏 노래를 부르던 요람은 청소년기를 무사히 지나게 해준 품속이었다.

형이 입대하면서 남겨둔 낡은 기타는 볼품없고 소리가 신통치 않았지만 그마저도 감지덕지, 훌륭한 친구였다. 스페인 당대 최고 기타 연주자 안드레 세고비아(Andrés Segovia)의 이름을 딴 세고비아 기타를 갖고 싶었지만 언감생심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낡은 기타는 평생을 친구 삼도록 인연 맺게 해준 소중한 물건이었다. 기타는 젊은 시절 어느 곳을 가건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큰 맘 먹고 낙원상가를 뒤져 마련한 기타는 최근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과 가을밤을 보내는 데 빠질 수 없는 친구다. 귀뚜라미처럼 아직 살아있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도구다.

며칠 전 모처럼 장모님이 집에 오셨다. 늦은 저녁을 먹고 술기운이 오른 김에 기타를 들고 재롱을 피웠다. 생전 처음 들려드리는 기타연주와 노래에 흔쾌해 하신 장모님은 아내의 고향인 광주에 산다. 처제와 처남이 살고 있는 광주는 간혹 방문하는 즐거운 곳이지만 늘 가슴 아프다. 처참한 우리의 근현대사가 남긴 상처를 안고 있는 광주는 처서가 지나도 뜨겁다.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건드려 덧나게 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1980년 5월 18일, 제3공화국의 몰락을 집권의 기회로 이용한 신군부는 계엄군을 이용해 광주를 짓밟았다. 군과 언론은 폭도로 규정한 시민들을 무차별 도륙했고, 언로가 막힌 당시 국민들은 광주를 치외법권의 '빨갱이 세상'으로만 치부했다. 헬기로 기관총을 난사하고, 폭격기로 광주를 박살낼 계획을 세웠던 신군부의 주축들은 아직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도륙을 합리화시키려는 추태를 보이고 있다. 진실을 알게 되고 난 후 느꼈던 자괴감과 함께 가진 마음의 부채는 평생 털고 갈 수 없는 짐이 되었다. 당시 광주에 폭격이 이루어졌다면.... 아내는 물론 아이들까지, 삶의 궤적이 많이 달라졌으리라는 상상만으로도 몸서리쳐진다.

처서 무렵에는 까마귀 대가리가 까질 정도로 덥다고 했다. 그런데 대가리 까진 신군부의 괴수는 아직도 골프채를 휘두르며 건재하다. 하지만 풀숲에서 여전히 살아있음을 타전하는 귀뚜라미들이 살아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최근 양심을 거스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목소리를 높이는 귀뚜라미처럼 스스로 살아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자기 목소리를 감추고 매몰차게 진실을 외면하는 비열한 처사는 이제 물러나야 한다.

오미자가 익어가고, 비록 풀숲에 몸을 감췄지만 우렁차게 노래하는 벌레들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가을이다. 내 목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먼지 앉은 기타를 들어 노래해야겠다. 아름다운 여인의 몸매를 흉내 낸 기타가 유혹하는 가을이다. 기타를 끌어안고 갈비뼈가 짓무르도록 밤새 노래하고 싶은 날이다.

 
▲풀벌레는 제 목소리를 내며 건재하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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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사 : 푸른 꿈이 익는다
[홍순천의 ‘땅 다지기’(33)] 진안 봉곡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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