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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lan ]
동지팥죽

[홍순천의 ‘땅 다지기’(42)] 진안 봉곡마을


편집부 기자 (2017년 12월 13일 22시05분02초)


(그림=홍순천)

흰 눈이 펄펄 날리던 대설이 지났다. 올해도 대설은 이름값을 했다. 산골에는 밤이 점점 더 깊어진다. 찬바람을 각오하고 나선 마당엔 고요한 달빛이 가득하다. 이마를 때리는 추위에 서글픈 손을 비비며 구운 고구마에 묵은지를 곁들여 먹고 싶은 밤이다. 을씨년스런 겨울밤에는 사람이 그립다. 길고 긴 추위를 견디며 봄을 기다리는 나무처럼 외롭지는 않아도 동지가 코앞에 다가온 요즘은 지난 추억 때문에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동지는 태양이 일 년 여정을 마치고 남회귀선에 이르러 잠시 숨을 고르는 날이다. 동지 이후 3일간, 태양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다가 다시 북쪽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북회귀선에 이른 태양은 하지에 이르러 또 잠시 숨을 고르고 남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태양은 푸른 지구별 모든 생명에게 젖을 주는 어머니다. 지금도 다르진 않지만 문명 이전의 지구인에게 태양은 생명을 관장하는 신이었다.

동지에는 팥죽이 제격이다. 동지팥죽은 유전인자에 각인된 정보처럼 우리에겐 잊을 수 없는 음식이다. 찹쌀로 빚은 새알심을 나이수대로 넣어 먹던 동지 팥죽은 기나긴 겨울밤을 관통하는 추억의 음식이다. 작은설로 불리던 동지에 팥죽을 먹지 않으면 나이를 한 살 더할 수 없다고 했다.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커다란 주걱으로 저으면 풀썩풀썩 끓어오르며 구수한 김을 피워 올리던 팥죽은 동짓달 추위를 잊게 했다. 붉은 팥죽을 장독대와 문간에 뿌리며 사악한 기운을 쫓던 수건 두른 어머니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추억은 빛이 바랬지만 일 년을 결산하는 동지를 기념하는 축제는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

페르시아 미트라교(Mithraism)의 오래된 동지 축제는 유명하다. 태양을 중심으로 삶을 설계했던 그들에게 동지는 지나칠 수 없는 기념일이었다. 로마의 농업신(農業神) 새턴(Saturn)을 기리는 '새턴네리아 축제' 역시 12월 21일부터 31일까지 성대하게 치러졌다. 성탄절은 초기 기독교가 그들의 동지 축제일이나 태양 숭배의 풍속을 참고해서 정한 날이다. 특히 12월 25일은 동지 뒤 3일 만에 부활한 태양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동지는 새로운 시작이다. 내년농사의 풍흉을 점치고 준비하는 날이다.

태양을 중심으로 정리한 24절기는 늘 변함이 없지만 달을 중심으로 한 음력은 태양력과 다소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윤달이나 윤일을 끼워 넣어 보정했다. 음력 11월 10일 이전에 동지가 들면 애동지, 중순이면 중동지, 하순에 들면 노동지라 했다. 애동지에는 팥죽을 먹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사악한 기운이 붙는다는 이유다. 동지는 밤이 길고 음기(陰氣)가 제일 강한 날이라 이를 물리칠 양기(陽氣)가 필요했다. 조상들은 팥죽의 붉은색이 악한 기운을 물리친다고 믿었다. 신분제도의 극심한 폐해가 남아있는 인도 홀리(Holi)축제에서 떠들썩하게 뿌리는 물감이 신분차별의 불평등을 잠시나마 덮는 도구라면, 팥죽은 같은 재료로 만든 음식을 고루 나누며 동질성을 확인하고 사악함을 물리치는 조용한 제사였다.

올해는 윤달이 들어 애동지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팥죽을 끓이지는 못해도 한해를 마무리하며 따뜻한 마음은 나누고 갈 일이다. 적반하장, 청산되어야 할 사람들이 붉은색을 두르고 그악스럽게 목소리를 높이는 요즘 동지팥죽이 그리 반갑지는 않다. 변덕이 죽 끓듯 해 구토를 유발하는 붉은색을 극복하고 화사한 봄을 맞이하려면 그래도 팥죽 한 그릇은 복용해야겠다. 햇살에 몸을 녹여 액을 면하고 사악한 기운이 씻겨나가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다. 깨진 거울을 추스르겠다는 의지가 서글픈 현실이다.

문밖을 나서면 찬바람이 코끝을 베어가지만, 추위는 더 강하고 향기로운 날을 준비하는 예방주사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두텁다.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듯 사무치는 봄은 새벽처럼 다가온다. 아직도 봄이 그립다.

 
▲팥죽처럼 붉은 연산홍은 겨울을 잘 이겨낸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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