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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lan ]

봄을 기다리며

[홍순천의 ‘땅 다지기’(47)] 진안 봉곡마을

편집부 기자 (2018년 02월 22일 18시)


(그림=홍순천)

유난스레 추운 날씨와 잦은 눈으로 힘들게 했던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절기로는 이미 봄이지만 잔설이 남아있는 앞산에 걸친 태양은 미세먼지 속에 가물가물 하루의 노역을 접고 있다. 화려하지도 새로울 것도 없는 노을이 쓸쓸하다. 산골 풍경은 이맘때가 제일 허전하다. 눈이 녹고 새잎이 피기 전, 봄을 기다리며 웅크린 산은 상처 입은 짐승이 동굴 속에서 털을 다듬듯 처량하다.

우수가 지났으니 봄이 보일듯해도, 애틋한 기다림을 외면하는 사람처럼 냉정한 칼바람에 아직 소매를 걷지 못한다. 바람 가득한 제주에서 꼼짝 못하고 숙소에만 머무르며 한솥밥을 먹고 온 형제들처럼, 때론 거친 일기가 약이 될 수도 있겠다. 날 맑아지면 제주의 해녀를 보러, 그들의 피멍든 가슴을 확인하러 가야겠다. 호흡에만 의지해 삶을 일궈온 그녀들의 가슴에 남은 훈장을 보고 와야만 속이 후련하겠다.

해녀들의 숨은 삶의 길이를 결정하는 중요한 잣대다. 땅에서 반, 물속에서 반평생을 지내는 그들의 삶은 타협할 수 없는 숨의 길이에 따라 달라진다. 속임수를 쓸 수도 없는 절대 조건에 순응해 살며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깨달아 해녀들은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 욕심 때문에 무리하면 바다는 무덤이 되고, 욕망을 다스리면 바다는 아낌없이 내주는 어머니의 품이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몸으로 알고 있다. 살기 위해 숨을 멈추는 역설이 놀랍다. 숨을 멈춰 자식들을 키우고 이승의 밥상을 차리는 해녀들은 남보다 빨리, 더 많이 갖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 숨을 넘어서면 목숨을 잃는다. 마지막 숨에 이르기 전에 물질을 마쳐야 한다.

1,000년 전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맥베스(Macbeth)의 얘기를 풀어낸 천재 셰익스피어는 지나친 욕망과 야심 때문에 파멸하는 인간군상에게 교훈을 던졌다. 전쟁영웅인 멕베스는 왕을 죽이고 자리를 차지했다. 마녀의 꼬드김에 마음속에 숨어있던 검은 야망을 불러내 실현한 그는 끊임없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불안의 씨를 없애려 애쓸수록 죄를 더해 가며 양심의 가책과는 다른 근본적인 불안이 점점 깊어진다. 잠 못 이루는 숱한 밤을 지새우며 그의 영혼은 점점 메말라갔다. 맥베스는 지나친 야심 때문에 스스로를 파멸시킨 대표적인 인물이다. 불안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영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최근 정치, 문화, 법조, 학계를 막론하고 세상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던 추악한 욕망이 까발려지고 있다. 아랫도리를 벗어 던지고 모자만 쓴 허구가 샅샅이 드러나는 세상에서 딸들을 키운 아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우월감, 혹은 학습된 관례라 치부하는 뻔뻔함이 혹시 내 안에도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온갖 편법을 동원해 모아둔 재산과 명예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꼴을 보자면 얼마나 허망할지, 잠 못 이루는 숱한 밤에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지 몹시 궁금하다.

봄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더 간절하다. 언덕에 심어둔 조팝나무는 아직 봄눈을 키우지 않아도 둥지를 찾아다니는 박새 부부의 날개는 분주하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봄은 오고 있다. 작년 윤달에 늦어진 대보름 달집을 만들자는 청년회장의 목소리가 곧 들려올 판이다. 소리 소문 없이 다가와 화들짝 피어나실 봄처럼 세상이 활짝 피어나기를 기대한다. 상처를 에워싸는 핏줄처럼, 새살을 부추기는 고통에 민낯으로 맞서야 한다.

마음 복잡한 설날을 지내고 남은 음식에 묵은지를 곁들여 저녁을 때웠다. 부지런히 해를 쫒아가는 초승달이 산등성에 남아있는 잔설 위에 초라하다. 재주가 지나쳐 덕을 잃은 우리시대의 가짜 영웅들이 맞이하는 몰락을 바라보며 입맛이 씁쓸하다.

 
▲그림자만 키우며 봄을 기다리는 현실이 목마르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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