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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pinion ]

천년의 땅에 무지개가 뜬다

[전북교육신문칼럼 ‘시선’] 박슬기
(산부인과 전문의, 페미의학수다 ‘언니들의 병원놀이’ 기획자)

편집부 기자 (2018년 04월 15일 17시)


(사진=박슬기)

4월의 첫 토요일. 새벽에는 벚꽃잎 같은 눈이 내리더니, 아침에는 축복하듯 햇살이 비추었다. 전주에서 처음으로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날이다. 일주일 전 혐오세력의 대규모 반대시위와 가두행진이 있었고, 오늘 역시 대규모 반대집회가 예고되었다. 조금 늦은 출발, 풍남문 광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무사히 치를 수 있기만을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에 광장이 가까워올수록 초조해졌다. 하지만, 광장에 이르기도 전 우렁찬 함성 소리가 들렸다. 여기라고, ‘여기에 우리가 있다’는, 무엇에도 갇힘 없이 터져나오는 함성. 초조한 마음은 새벽에 내렸던 눈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설레임을 안고 풍남문 광장에 들어서자, 천오백 여 명의 사람들이 비좁을 정도로 그곳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숨김없이 밝고 자유로이 상기된 얼굴들. 호위하듯 광장을 에워싸고 펄럭이는 수많은 깃발. 쉼 없이 쏟아지는 박수갈채와 환호성. 쿵. 쿵. 가슴이 뛰었다.

‘퀴어(Queer)’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기묘한’이라는 뜻이다. 흔히 LGBT라고 이르는 레즈비언(L, 여성 동성애자), 게이(G, 남성 동성애자), 바이섹슈얼(B, 양성애자), 트랜스젠더(T, 사회적 성이 신체적 성과 다름) 이외에도 성적 정체성은 각 개인마다 숱하게 다양할 수 있다. 요즘 쓰이는 말마따나 ‘오조오억 개’의 성적 정체성이 가능한 것이다. 오직 이성애만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에 빗댄 표현으로, ‘기묘하다’는 뜻을 가진 ‘퀴어’란 이렇듯 수많은 성적 소수자들을 아울러 일컫는 이름으로 자리잡았다. “그래 우리 좀 이상해, 그래서 뭐?”라는 당당한 선언인 것이다. 퀴어축제란 우리 사회에서 ‘기묘한’ 존재인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차별과 혐오의 일상에 균열을 내고자 시작되었으며, 이 역사는 무려 1969년 6월 2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뉴욕의 그리니치에 있던 작은 게이바 ‘스톤월’은 유색인종, 트랜스젠더, 빈민, 드랙퀸 등 사회최하층민 계급이 모이던 곳이었다. 당대 미국은 성소수자를 탄압하는 분위기였고, 경찰은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정당한 이유없이 그들을 체포하고 처벌했다. 이 같은 일이 반복되자 6월 28일 무력하게 당하던 이들이 합심해서 경찰에게 격렬히 저항했고, 진압을 위해 정예부대까지 동원되자 2천여 명의 성소수자들이 모여들어 물러서지 않고 7월 2일까지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스톤월 항쟁’을 기념하고자 ‘게이 퍼레이드’가 개최되었고, 이는 곧 미국 전역을 넘어 세계 각지로 퍼져 오늘날의 퀴어축제가 시작되었다. 불의에 항거하는 투쟁으로 시작된 이 축제는, 성소수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자유롭게 거리에 나서는 것 자체가 2018년 오늘날에도 여전히 격렬한 투쟁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퀴어문화축제는 2000년 서울에서 시작된 이래 매년 퍼레이드, 퀴어 영화제, 퀴어 파티 등을 포함한 행사로 개최되며, 강연, 토론회, 전시회, 사진전 등이 함께 열리기도 한다. 이외에도 부산, 대구, 제주 등에서 매년 퀴어축제가 열리고 있으며, 올해 첫 개최되는 광주와 전주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제주라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광역시를 제외한 지역 소도시로서는 전주가 최초이다. 인구 65만의 작은 도시인 전주에서 퀴어축제가 열린다는 것은 그 의미가 크다. 대도시에 비해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만큼 자신의 존재가 노출될 수 있는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광장을 가득 메운 이들은 퍼레이드가 시작될 즈음 점점 불어나 2천여 명을 훌쩍 넘어섰다. 풍남문. 관통로. 한옥마을.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 내가 매일 걷던 이 동네에서, 내가 오직 나 자신으로서 숨김 없이 당당히 걸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가슴 벅참.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단 하루의 경험이 된다. ‘누가 나를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마저 떨치고 거리에 설 수 있게 한 용기는 그만큼 깊은 간절함이 아니었을까.

우려했던 대규모 혐오세력과의 충돌은 없었지만, 광장 곳곳에는 동성애 혐오 문구를 적어 들고 선 사람들이 있었다. 무대에 오른 공연자 중 한 명은 말했다. “앞에 피켓 들고 오신 한 분(혐오세력)이 계속, 너희들 차별 안하는데, 그런데 왜 이 대낮에 나와 있니? 너희들 괜찮은데, 그런데 좀 숨어 있으면 안돼? 라고 하는 거에요. 우리 오늘 하루지만 얼굴 내놓고 숨어 있지 않고 열심히 춤추고 싶어요. 365일 우리가 프라이드를 갖고 지낼 수 있는 매일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대낮에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네 존재를 숨기라고 강요하는 것.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함께 하기를 거부하는 것. 다름 아닌 그것이 혐오이고 차별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오늘의 퀴어축제가 필요한 이유다. 우리가 웃고 춤추고 환호하고 거리를 행진하는 이유. 성소수자가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알리는 것, 그것 뿐이다.

전국 곳곳에서 온 연대단체의 깃발들이 휘날리는 가운데 지지발언과 공연들이 이어졌다. 무엇에라도 박수와 웃음과 환호가 쏟아졌다. 옆에 있는 누구라도 안아주고 싶어지는 강렬한 연대감이었다. 그중에도 아이돌 커버댄스 공연을 잊을 수 없다. 소위 아이돌 그룹의 춤이란 극단적으로 상업화되고 대상화된 ‘남성성’과 ‘여성성’의 전시라고 할 만 하다. 하지만 퀴어축제에서 여성 아이돌 그룹의 춤을 추는 이들의 모습에서는 어디에도 ‘여성성’을 빌미로 전시되는 성적 대상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토록 자유롭고 힘 있게 여성의 신체가 움직이는 것을 처음 본 것만 같았다. 다른 팀의 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익숙한 노래, 익숙한 안무이지만 낯선 감동. 그것은 누구도 ‘남성’과 ‘여성’으로 기대되지 않는, 단지 나 자신, 한 인간의 몸에서 발산되는 자유로움에 대한 것이었다. 시각장애인의 성악 공연도 인상적이었다. 광장에 울리는 ‘넬라판타지’ 노랫소리에 순간 모두 숨을 죽였다. 마치 영화 <쇼생크탈출>에서 운동장에 오페라가 울려 퍼지던 장면처럼, 우리도 삶을 누릴 자유가 있다는 울림이 느껴졌다.

 
지난 4월 7일, 전주에서 처음으로 퀴어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사진제공=언니들의 병원놀이

전주 시내 복판을 질러 4km 여를 행진하는 동안, 우리의 구호는 점차 노래와 춤으로 바뀌었다. 나란히 걷는 낯선 이들과 흔쾌히 인사와 웃음을 나눴다. 전주시청 앞에 멈춰 서서 고공농성 중인 택시노동자에게 손을 흔들 때에는, 영화 <런던 프라이드>에서 성소수자와 탄광노동자가 연대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한옥마을에 이르러서는 붐비는 관광객들을 향해 웃으며 무지개 손깃발을 흔들었다. 동성애 혐오 팻말을 들고 선 혐오세력을 지나칠 때, 우리는 모두 웃었고, 우리 중 누군가 나직이 말했다. “천국 가세요.” 분명 축복의 글자들인 그 말에, 팻말을 들고 선 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더니 팻말 뒤로 얼굴을 숨겼다. 웃음으로 혐오세력을 고개 숙이게 할 수 있는 단 하루. 하지만 이 단 하루의 기억이 누군가에게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364일 동안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자책하도록 강요하는 사회에서 고통스러울 때, 이 단 하루가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 작은 힘이 어쩌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이쪽 세계로 손을 내미는 따뜻한 용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퀴어’다. 같은 사람은 없다. 획일적인 기준을 강요하며 정상과 비정상을 끊임없이 가르는 사회에서 나 자신을 지키며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모두 ‘퀴어’일 수밖에 없다. 고백하건대, 오늘처럼 오직 긍정적인 기운만으로 가득찬 광장을 나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 만약 이 기운을 측정할 수 있었다면, 필시 무지개빛 오로라가 우리를 감싸고 봄날의 꽃보다 아름답게 빛났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내년에 있을 두 번째 축제가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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