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8년07월18일21시12분( Wednesday )



[ plan ]

태풍이 몰아쳐

[홍순천의 ‘땅 다지기’(58)] 진안 봉곡마을

편집부 기자 (2018년 07월 12일 14시)


(그림=홍순천)

지난겨울 혹한을 견디지 못한 포도나무는 봄 싹을 제대로 틔우지 못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가지에서 올라온 새싹은 병원 신세를 지는 동안 제멋대로 자라 꽃을 피우고 제법 실한 포도송이를 달고 있다. 장독대 옆에는 다독이며 심었던 백합이 피었다. 그칠 것 같지 않은 장맛비에 주제넘게 큰 꽃송이를 피운 백합은 바닥에 쓰러졌다. 폭우와 바람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귀하게 여긴 것이 오히려 초라해지는 순간이다. 상처 입은 뿌리를 세워주려다 마음을 돌렸다. 제 스스로 상처를 이겨내고 바로 설 수는 없지만 그런대로 바닥에 누워 씨를 맺는 지혜를 배우리라는 터무니없는 믿음 때문이다.

태풍의 계절이다. 한낮이면 뜨겁게 달궈진 땅을 식히는 소나기 한줄기가 그립지만 지긋지긋하게 물고 늘어지는 장맛비가 야속한 시절이다. 지구 환경이 달라져 이상해진 날씨가 인류를 괴롭히지만 자업자득 감내해야 할 일이다. 태평양에서 발생해 강한 바람과 비를 몰고 다니는 태풍은 여름 더위에 나른해진 사람들을 긴장시킨다. 극지방보다 더 많은 태양열을 받는 적도부근의 기온이 상승하면 열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상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장마 꼬리를 물고 태풍이 불어온다. 올해도 어김없이 태풍이 찾아왔다.

태풍은 나무뿌리를 통째로 뽑아 뒤집기도 하고 바다를 엎을 듯 분노하기도 한다. 물폭탄을 맞은 일본에서는 많은 사람이 죽기도 했다. 평안한 일상을 뒤 흔들어 괴롭히는 태풍은 가히 폭군처럼 사람들을 괴롭히지만 세상을 정화시키는 약이다. 속속들이 오염된 바닷물을 뒤집어 정화시키고 나무에 매달린 불필요한 가지들을 떨궈내 숲을 건강하게 만든다. 오래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바닥을 뒤집어 순환시키지 않으면 아무것도 살지 못한다. 대단한 폭력으로 괴롭히는 태풍은 세상을 정화시키는 마고할미의 약손이다.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Gaia)와 거인 족 타르타루스(Tartarus) 사이에서 태어난 태풍(Typhoon)은 파격적인 폭풍우로 세상을 정화시킨다.

우리는 오랫동안 고인 물속의 부족한 산소로 어렵게 버티며 살아 왔다. 권력을 쥔 사람들은 물론 그들에게 쇠뇌당한 많은 사람들이 우주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썩은 물속에서 살아왔다. 반성하거나 바꿀 필요 없이 오랫동안 걸쳐온 의복처럼 익숙한 현실이었다. 최근 태풍처럼 몰아지는 세상의 변화를 실감한다. 고인물의 맨얼굴이 드러나고 썩어 문드러진 악취가 속속들이 탄로 나기 시작했다. 성난 파도처럼 광화문 네거리에 일렁이던 촛불의 힘으로 세상의 밑바닥이 뒤집어지고 있다. 태풍처럼 몰아치는 변화를 거부하는 총칼이 계엄령을 코앞에 들이밀고 있었다는 사실에 경악하지만, 그나마 들통 나서 다행이다.

“인간의 의무가 악을 근절하는 데 몸을 바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다른 일을 추구할 권리는 당연히 있다. 그러나 최소한 악한 것과 관계를 끊을 의무는 있다. 악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악한 것을 지원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자신의 사업이나 계획을 추진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올라타고 앉아 괴롭히는 것은 아닌지 먼저 살펴봐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그 사람의 어깨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 역시 자신의 계획을 추진할 수 있도록 말이다”(데이빗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 중에서).

태풍이 반가운 계절이다. 공포를 조장하며 몰아치는 태풍은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치러야 할 통과의례다. 장독대 옆에 쓰러진 백합은 여전히 진한 향기를 내며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폭풍우가 지나고 나면 말갛게 세수한 얼굴로 열매를 맺을 포도나무처럼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세상을 기대하며 바람 맞으러 마당으로 나선다.

태풍이 몰아쳐 세상이 맑아지기를 기대하는 아침이다.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은 백합 향기가 여전하다

[글쓴이 홍순천은]
1961년 경기도 양주 산.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쓰고 책 만드는 일과 환경운동에 몰입하다가 서울을 탈출했다. 늦장가 들어 딸 둘을 낳고 잠시 사는 재미에 빠졌지만 도시를 벗어났다. 아이들을 푸른꿈고등학교(무주 소재 대안 고등학교)에 보내고 진안 산골에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다. 이제는 산골에 살며 바라보는 세상과, 아이들 얘기를 해보고 싶은 꽃중년이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 스트로베일하우스’ 출간.
- (전)푸른꿈고등학교 학부모회장.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을 끊지 못하는 소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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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사 : 콩알만 한 감자
[홍순천의 ‘땅 다지기’(57)] 진안 봉곡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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