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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굴곡진 현대를 표류하다

수현이의 문학생각 - 한국현대문학 읽기(14-백석)


  (  문수현   2020년 04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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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시절의 백석. 그림 강현화

(글 문수현)

백석(白石)은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수원 백씨 17대손인 아버지 백시박(白時璞)과 단양 이씨인 모친 이봉우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 문학활동을 하면서는 본명을 쓰지 않고 필명을 줄곧 사용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광복한 후 사실상 백석(白石)으로 정식 개명했다. 석(石)이라는 이름은 일본 시문학가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작품을 매우 좋아해 그 이름의 석을 썼다는 설이 있다.

그의 아버지 백시박은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으나 오산고보의 설립을 위한 건축기금을 마련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세 아들을 뒀는데 장남(백석)이 기행(夔行)이고, 그 아래 협행과 상행이 있다. 장남의 이름에 왜 굳이 어려운 한자 ‘기’(夔:조심하다)를 썼는지 알 수 없다.

백석은 1924년 소월의 숨결이 어려 있는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했다. 오산학교를 같이 다닌 친우에 따르면 이 시절에 백석은 소월을 몹시 동경했으며, 매우 결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백석은 오산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30년 조선일보 신년 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母와 아들」이 당선됐다. 다시 말해 그의 문단 데뷔는 시가 아니라 소설을 통해서였다. 그래서일까. 백석의 시를 읽어보면 이야기하듯이 써내려간다. 다시 말해 서사(敍事: 사실을 그대로 적음)적 특성이 강하다.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처음에는 시를 썼다고 한다. 시인이 되기 위해 자신의 습작시를 가지고 문단의 원로를 찾아갔는데, 그 시편들을 본 원로가 “시보다는 소설을 쓰는 것이 더 낫겠다”고 조언해 소설로 전향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고 보면 소설가가 될지 시인이 될지는 작가의 선택이기도 한가 보다.

백석과 정주 연고, 조선일보

백석의 경우 1930년 신춘문예 당선작 「그 母와 아들」 발표 후 1935년 「마을의 유화(遺話)」와 「닭을 채인 이야기」를 끝으로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소설 같은 느낌을 주는 이야기체로 시를 씀으로서 산문(散文) 정신을 내내 유지해나간다.

한편 그는 1933년 조선일보사가 후원하는 장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감리교 재단의 명문 사립대학인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大學)에서 영문학을 공부한다. 이듬해 졸업하고 귀국해 조선일보사에 입사하며 나중에는 그 계열사인 『여성』지의 기자로 일하는 등 조선일보와의 오랜 인연을 이어간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나서 청년시절까지 보냈다. 정주는 이광수, 김억, 김소월 등 한국문학사의 대가들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이광수의 출생지는 백석과 같은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이며 번지수만 다르다.

조선일보는 1920년 3월 5일에 창간됐다. 일본의 문화정치가 실시되면서 동아일보와 함께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았다. 창간 당시에는 대정친목회를 모체로 조진태 사장으로 시작했다가 자금난으로 송병준에게 넘어갔다. 송병준은 원로 언론인 남궁훈을 사장으로 영입한다. 1924년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뒤로는 ‘민족의 사표(師表)’로 추앙받던 이상재가 사장으로 추대된다.

이 무렵 일제와 타협적이던 동아일보와는 달리 조선일보는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다. 좌파와 우파가 연합한 최대 독립운동조직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홍명희와 박헌영, 김단야 등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조선일보에 입사하면서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후 계속적인 경영 악화로 조만식을 거쳐 방응모에게 소유권이 넘어간다. 그 후 보수적인 언론인들이 조선일보사를 주도하면서 보수주의 관점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이후 조선일보는 현재까지 ‘정론지’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새 경영자 방씨는 정주 출신이며 금광으로 갑부가 된 인물이다. 그가 새로운 경영진을 출발시킨 것은 1933년 7월이다. 조만식 사장 다음을 이은 방 사장 진용으로 조직이 개편돼, 정주 출신의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가 부사장 자격으로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긴 것은 1933년 8월이었다. 평양 출신 주요한이 동아일보에서 조선일보 전문이사로 들어온 것은 1934년이다. 역시 평양 출신 김동인이 조선일보에 근무한 것도 이 무렵이다.

조선일보를 통해 소설로 데뷔한 백석은 시인으로서도 조선일보를 통해 등단했다. 그가 처음 발표한 시는 바로 ‘정주성(定州城)’(조선일보 1935.8.31.)이다. 지연(지역연고)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제목이다. “나 여기서 왔소!”라는 부르짖음이다. 그가 조선일보의 비호를 받아 그 장학금으로 일본 유학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로 보아, 백석의 지연 호소는 톡톡히 효과를 발휘한 셈이다.

『사슴』의 세계

백석은 1936년 1월 20일에 시집 『사슴』을 간행했다. 이 시집에는 총 33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사슴’이라는 시는 없다).

이 시집 안의 작품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평안북도 방언의 빈번한 사용이다. 특히 그 방언들은 주로 사물을 가리키는 어휘들에 집중돼 있어 작품들을 매우 낯설게 만든다. 외래어도 아닌 순수 토착어인 우리의 방언으로 생소한 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이 이 시집이 지닌 중요한 성과의 하나다. (고형진, 2008)

예를 들어 「가즈랑집」은 시집 『사슴』 맨 처음에 있는 시로, 그런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의 전문(全文)을 본다.

승냥이가새끼를치는 전에는쇠메드ᇍ도적이났다는 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 고개밑의
山넘어마을서 도야지를 잃는밤 즘생을쫓는 깽제미소리가 무서웁게 들려오는집
닭개즘생을 못놓는
멧도야지와 이웃사춘을지나는집

예순이넘은 아들없는가즈랑집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니가 마을을 가면 긴담배대에 독하다는막써레기를 멫대라도 붗이라고하며

간밤엔 셤돌아레 숭냥이가왔었다는이야기
어느메山곬에선간 곰이 아이를본다는이야기

나는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먹으며
녯말의구신집에있는듯이
가즈랑집할머니
내가날때 죽은누이도날때
무명필에 이름을써서 백지달어서 구신간시렁의 당즈깨에넣어 대감님께 수영을들였다는 가즈랑집할머니
언제나병을앓을때면
신장님달련이라고하는 가즈랑집할머니
구신의딸이라고생각하면 슳버젔다

토끼도살이올은다는때 아르대즘퍼리에서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山나물을하는 가즈랑집할머니를딸으며
나는벌서 달디단물구지우림 둥글네우림을 생각하고
아직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까지도 그리워한다

뒤우란 살구나무아레서 광살구를찾다가
살구벼락을맞고 울다가웃는나를보고
미꾸멍에 털이멫자나났나보자고한것은 가즈랑집할머니다
찰복숭아를먹다가 씨를삼키고는 죽는것만같어 하로종일 놀지도못하고 밥도안먹은것도
가즈랑집에 마을을가서
당세먹은강아지같이 좋아라고집오래를 설레다가였다 (『사슴』, 1936)

독자가 이 시를 끝까지 읽고도 ‘가즈랑집’이 뭔지 모른다면, 그 이유는 시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독자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다. 가즈랑은 고개 이름이고, 가즈랑집은 가즈랑고개 밑에 있는 집이다. 시의 첫 세 줄에 그 답이 나와 있다. 물론 가즈랑할머니는 이 집에 사는 할머니의 택호(宅號)다. 몇몇 단어들이 낯설지만 차분히 감상해보면 전체 모습이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그 점을 시인 겸 비평가 박용철이 잘 지적했다. 그는 백석의 시집 『사슴』을 평하면서 “백석씨의 시집 『사슴』 일권을 처음 대할 때에 작품전체의 자태를 우리의 눈에서 가리어버리도록 크게 앞에 서는 것은 그 수정없는 평안도방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작품의 주는 바를 받아들이려는 호의를 가지고 이것을 숙독(熟讀: 뜻을 생각하며 자세히 읽음)한 결과는 해득하기 어려운 약간의 어휘를 그냥 포함한 채로 그 전체를 감미(鑑味)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모어(母語)의 위대한 힘을 깨닫게 된다”라고 했다. (조광(朝光) 1936.4)


△ 학풍. 백석의 시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이 실렸다(1948.10)

그런가하면, 시집 『기상도』와 태양의 풍속』 등으로 유명한 모더니스트 김기림은 다른 측면에서 『사슴』을 칭찬했다.

시집 『사슴』의 세계는 그 시인의 기억 속에 쭈그리고 있는 동화와 전설의 나라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실로 속임없는 향토의 얼굴이 표정한다. 그렇건마는 우리는 거기서 아무러한 회상적인 감상주의에도, 불어오는 복고주의에도 만나지 않아서 더없이 유쾌하다.
백석은 우리를 충분히 애상적이게 만들 수 있는 세계를 주무르면서 그것 속에 빠져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얼마나 추태라는 것을 가장 절실하게 깨달은 시인이다. 차라리 거의 철석(鐵石)의 냉담에 필적하는 불발한 정신을 가지고 대상과 마주선다.
그 점에 『사슴』은 그 외관의 철저한 향토 취미에도 불구하고 주착없는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 1936.1.29.)

‘철석의 냉담’이라고까지 하면서 백석에게 ‘모더니티’를 부여하려는 김기림의 이런 평가는 조금 뜻밖이다. 백석의 시는 복고주의라고까진 못하더라도 어린 시절의 기억을 향토적 서정을 담아, 그것도 따뜻함과 그리움 같은 정서를 담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김기림은 1930년대 중반 모더니즘의 때이른 퇴조 내지 변질을 목도하며 건강한 모더니티를 이어나갈 신진으로 백석에게 기대를 가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편, 백석의 향토 취미와 평북방언 애용에 근거해 그를 ‘민족의 시인’에 가두거나 ‘조선 고유의 토속적 세계를 탐구했다’거나 하고 평가하는 태도도 옳지 않다고 여겨진다. 그는 『사슴』에서 향토와 고향을 읊은 동시에 경상도의 「통영」(지금 충무시)도 일본의 「카키자키(柿崎)의 바다」, 일본의 국도 「이즈쿠니소카이도(伊豆國湊街道)」도 꼭 같은 수준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김윤식, 2008)

북한에서의 굴곡

백석이 만주의 신경에서 1939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머물다 해방 후 신의주를 거쳐 고향인 정주로 돌아간 다음 1948년 무렵 이 시를 썼다. 또한 이 시는 한반도가 분단되기 이전에 백석이 발표한 마지막 작품 가운데 하나다.

백석은 분단 이후에 계속 북한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다. 1955년에는 조쏘출판사에서 여러 사람과 공동으로 푸시킨의 작품을 번역해서 출간했고, 1957년에는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출간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리니.// 마음은 앞날에 살고/ 지금은 언제나 슬픈 것이니/ 모든 것은 덧없이 사라지고/ 지나간 것은 또 그리워지나니.”

인생이란 제목으로 익숙한 이 시를 번역한 이가 바로 백석이다. 동화시집인 『집게네 네 형제』에는 「쫓기달래」 「오징어와 검복」을 비롯해 12편이 실려 있는데, 내 주변에는 초등학생들에게 이 동화시를 감상하고 그림으로 표현하게 하는 미술수업을 하는 이도 있다. 또 논문 검색을 해보니 이 동화시집을 활용한 교육활동을 모색한 것들도 있었다. 역시 예술은 오래 지속된다.

백석은 1956~7년 북한문학계에서 아동문학 논쟁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유년문학에서 사상성이란 계급의식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높은 휴머니즘, 선과 악에 대한 정확한 의식, 아름다운 것에 대한 지향, 낙천성, 예절 등이 포함된다”고 하면서 ‘아동문학의 협소화’에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1958년 10월 이후 몰아닥친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심한 좌절을 겪은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문학의 도식주의화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문학을 요구했던 일련의 문학가들이 된서리를 맞았는데, 비평가 안함광과 한효, 소설과 조중곤과 전재경, 시인 김순석 등이 그런 비판의 표적이 됐다. 백석은 비판의 직접 표적이 되는 것은 피했지만 1959년 3월 당의 ‘붉은 편지’를 받들고 삼수군 관평리 국영협동조합으로 쫓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백석은 작품 활동을 완전히 중단하지는 않았다. 김재용 교수가 그 중 1959~61년 사이 12편의 시와 4편의 산문(정론)을 발굴해 『백석전집』에 수록했다. 이 작품들은 ‘당과 조국의 은혜’ ‘한없이 아름다운 공산주의’ ‘사회주의 건설에 바치는 힘’(sic) 같은 이념성 짙은 어휘들을 하나같이 포함하고 있다.

이는 분단 전 백석의 시적 경향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과 만주를 겪어내면서도 ‘외롭고 높고 쓸쓸한’ 고독과 허무의 숲을 거닐던 그가 아닌가. ‘모더니티’를 품고 있다고 김기림이 상찬(賞讚)한 『사슴』의 시 세계와 판이함은 물론이다. 또 1958년 이전에 창작한 『집게네 네 형제』의 ‘휴머니즘·선악판별·아름다움’ 지향과도 다르다. 백석은 스스로 자기의 문학을 ‘협소화’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던 것일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백석 시인은 떠났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다. 다만 그것들은 독자들에게 결코 쉽지 않은 무게로 다가온다. 백석과 그의 작품은 한국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표류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백석(정효구), 문학세계사, 1996
백석전집(김재용), 실천문학사, 2003(재판)
한국현대문학사·수정판(김윤식),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8
백석(고형진), 약전으로 읽는 문학사1, 소명출판, 2008

[글쓴이 문수현은]
전북대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현재 전북교육신문 기자.
[그린이 강현화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지금은 시골살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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