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스쿨링, ‘지금행복’을 위한 선택
[전북교육신문 칼럼-‘시선’] 이규홍(진안군 주천면 무릉리)



<이규홍의 시선 4>
“홈스쿨링, ‘지금행복’을 위한 선택”

도시생활을 접고 귀농을 한 지 이십 년이 지났다. 아이들이 홈스쿨링을 시작한 지도 구 년이 흘렀다. 처음 귀농을 할 때도 그랬고, 큰아이가 멀쩡히 잘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홈스쿨링을 하겠다고 했을 때도 그랬다. 너 미쳤냐? 왜 그래? 당신 이상주의자 아냐? 아님 사회부적응?
다 맞다. 아니 다 틀렸다. 세상의 밑바닥을 맨몸으로 기며 살아온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이상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내 근성과 깡다구가 삶을 포기할 만큼 여리지도 않다. 맨바닥을 기며 살아오면서 온몸으로 터득한 건 살아남기 위한 방법과 세상을 보는 눈이었다. 자본주의의 소모품이자 수탈자인 약한 것들끼리 싸우면 안 된다. 손잡고 연대해야 한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아니 내 자식들이 살아가는 동안에도 이 세상은 결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뒤집어지지 않는다. 거기에 깊이 발을 담글수록 손해 보는 건 약자인 나와 같은 인민들이다.

<자, 이제 어쩔 것인가?>
앞도 뒤도 막막한데, 사다리도 이미 사라졌는데……. 이리 재고 저리 재 봐도 승산이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불리할 때는 도망하여 몸을 보존하는 것이 상책이다. 탐욕스런 자본과 그에 기생하는 권력이 선점한 주류의 세상에서 도망치는 거다. 살아남기 위하여 삼십육계!

<줄행랑이 필요한 이유 하나, 경제적인 이유다.>
한때 적하효과라는 말이 있었다. 상층에 쌓인 부가 넘쳐흘러서 아래를 적신다는 기괴한 경제논리다. 그런 적이 한 번이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암튼 레이거노믹스 이후 경제학자들은 정부가 기업이나 재벌들을 지원해 기업이 부를 쌓게 되면 그 부가 자연스레 아래로 넘쳐흐르리라고 주장을 해왔다. 이른바 하향식분배가 이뤄지는 거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서 이게 가당키나 한 소린가? 삼성과 현대가 보유한 현금이 100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에겐 엄청난 돈이지만 그들은 아직 배가 고프다. 이렇듯 기업과 재벌들은 자신들의 부를 아래로 흘려보내기는커녕 아래에다 글로벌하고 긴 빨대를 꽂고 쪽쪽 빨아대고 있다.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소비자의 주머니를 털고,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해 자신들의 부를 더 많이 쌓으려고 혈안이 돼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게다. 위의 부가 아래로 흐르는 기적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부자는 더 부자로, 가난뱅이는 더 가난하게! 이것이 자본주의의 슬로건이다. 지금도 나와 당신의 이 하잘 것 없는 부가 재벌들에게 빨아올려지고 있다. 일러, 상향식분배가 이뤄지는 거다. 그러니 더 이상 내 피 안 빨리려면 잽싸게 도망쳐야 한다. 어디로? 자본의 손길이 최대한 미치지 않는 안전한 곳으로. 바로 자급자족의 삶터다.

<줄행랑이 필요한 이유 둘, 교육적인 이유다.>
주입식, 경쟁적, 획일적 교육방식, 이건 뭐 두말하면 입 아프다. 각자의 소질과 적성에 따라 다양하게 교육내용을 세우는 것, 이건 산업자본주의의 교육철학에 부합되지 않는다. 사족을 달자면 산업자본주의가 바라는 교육이란 기업의 입맛에 맞는 소비자와 일꾼, 그리고 사회의 질서에 순응하는 온순한 시민을 양산해내는 게 아니겠는가? 억지라고? 이건 교육부장관과 싸워도 내가 이길 수 있다. 어쨌든 좋다, 여기까지도 참을 수 있다. 그런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게 이렇게 자신의 청춘과 부모의 피땀을 바쳐 온 가족이 고생하며 공부를 했고 대학까지 나왔다. 게다가 외국어자격증이며 심지어 성형까지 해가며 사회가 요구하는 온갖 자격을 다 갖췄다. 그런데 미래가 보장이 안 된단다. 헐~ 정말 헐이다.
어른들이 약속했잖은가, 사회가 약속했잖은가. 열심히 노력해라, 죽도록 공부해라, 그러면 너희의 미래가 열릴 것이라고. 그런데 이 사회는 이들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이렇게 약속은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말았다. 참 더러운 세상이다. 하릴없이 죽음을 선택하는 어린아이들, 청년들, 대물림 받은 가난 때문에 연탄가스를 피우는 사람들 속에 나와 우리 아이들이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나는, 내 가족은, 우리 아이들은 안전하리라고 믿을 수 있는가? 믿을 수 없다면 도망쳐야지. 안전한 곳으로.


(▲고구마를 심는 홈스쿨링 가족들.)

<즐겁게 줄행랑을 놓을 수 있었던 세 번째 이유, 희망의 발견이다.>
아직도 숫자로 보면 많지는 않지만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꽤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유유상종이라 했던가. 내가 가고 만나는 이들이 제한적이라 그런지 자주 보게 된다. 이들은 입성만 척 봐도 안다. 개량한복을 입었거나, 머리를 길게 길러서 뒤로 묶었거나, 화장기라고는 없는 맨얼굴에 파마는 절대 안하고, 쓸데없이 실실 잘 웃는 사람은 보나마나 우리 편이다. 첫 만남에 눈이 맞아 집이라도 방문해 보면 그의 정체가 더욱 확실해 진다. 도시는 내가 별로 가보지 못했기에 농촌으로 한정지어 보자면 그 풍경이 이렇다. 손수지어 삐뚤빼뚤 엉성한 집이 그들이 사는 곳이다. 집의 전면에는 태양열을 이용한 열풍기, 건조기, 그리고 화덕 따위가 보인다. 아마도 에너지 자급을 위한 나름의 고심과 실천에서 나온 것들이리라. 마당에는 텃밭이 있는데 하나같이 잡초라 일컫는 풀과 작물을 같이 키우고 있다. 그리고 집 뒤편에는 생활의 필요를 스스로 충족하기 위한 작업도구와 공간이 마련돼 있다. 이리저리 봐도 일정한 수입이 없는 것 같은데 온 가족이 태평하고 여유롭다. 햇살 잘 드는 곳엔 장독대가 잘 모셔져 있고 단지들이 장들로 그득 차있다. 밥상을 받아보면 거의 확실해진다. 잡곡밥에 손수 농사지은 푸성귀와 장아찌, 발효식품들이 성찬으로 차려져 나온다. 그리고 결정적인 하나, 평일 낮인데 애들이 학교를 가지 않고 집안이며 마당에서 뒹굴며 놀고 있다. 이들은 입성은 비록 꾀죄죄할망정 그 마음이 곤궁하지 않고 여유롭고 당당하다. 정말 당당하다. 자급자족의 삶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자존감은 누구도 함부로 범접하기가 힘들다. 홈스쿨 초기에 이런 이웃들을 많이 만났다. 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간다면 이 길도 외롭지 않으리라. 그리고 나도 이들처럼 지금 당장 행복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미래에 저당 잡히지 않은 지금행복!>
총명주사라는 근거도 없는 약에 의존하면서까지 공부와 시험에 목숨을 거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독서실과 방에다 CCTV를 설치해 아이들을 감시하는 부모들을 보고 있노라면 답답함을 넘어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양육도, 교육도 아니다. 그냥 사육이다. 공부를 위한 사육. 그리고 망상에 사로잡힌 부모에 의한 학대다. 에리히 프롬도 ‘오늘 나의 사랑이 자녀에게는 독재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진안군 주천면 무릉리 필자의 집에서 산책하는 홈스쿨링 어린이들.)

미래의 안온한 삶과 행복을 위해 총명주사를 맞으며 감시를 당하며 지금의 여유와 행복을 유보하는 게 타당한 일일까? 여기엔 덧붙여야할 조건이 하나 따른다.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어쩌다, 정말 하늘의 별 따기로 대기업에 취직하는 대박을 쳐도 수명이 고작 십년이란다. OECD국가 중 한국은 내리 팔 년째 자살률 1위에다 아동행복지수는 육 년째 꼴찌다. 이제는 아무 새삼스러울 게 없는 통계들이다.
사람들이, 그것도 젊은, 아니 어린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당장 힘들고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디서도 희망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희망이 없다는 것만큼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게 어디 있으랴.
그런데 목숨 줄을 놓는 그들은 희망을 엉뚱한 데서 찾고 있었다. 메이저리그에서 삼류, 사류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밟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주전들이 한날, 한시에 모두 발모가지가 부러지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선수대기실에서 백날천날 죽치고 있어봐야 물주전자 심부름밖엔 할 게 없다. 그러느니 차라리 이부, 삼부 리그로 내려가거나 아예 비슷한 수준의 선수들끼리 뭉쳐 다른 마이너리그를 하나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거기서라면 선수로 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관중은 적을지라도. 그러나 처음부터 잘못 시작한 일이었다. 애초에 메이저리그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면 그 힘들고 험난한 시기를 겪지 않았어도 됐으리라. 조기축구나 동네야구선수가 목표였다면 인생이 훨씬 덜 고달팠을 거란 말이다.

<우리의 야심을 부채질하고 희망을 얘기하는 모든 자들을 의심하고 경계하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아무것도 되지 않으면 굶어죽을 수 있다는 협박! 그건 그냥 협박이다. 내가 생각을 바꾸고 마음만 열면 절대 굶어죽지 않는다. 하늘이 우리 조상님께 분명히 약속하셨다. 사람은 제 먹을 건 제가 가지고 태어난다고.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대한민국, 사람이 굶어죽을 만큼 못 살지 않는다. 잘사는 나라다.
멀리, 넓게, 깊게 볼 수 있는 눈과 가슴만 있다면 쓸데없는 꿈 같은 거 꾸면서 시간을 허비할 일도 없으리라.
이건 오해의 소지가 좀 있는 말이겠지만, 난 아이들에게 꿈 같은 거 꾸지 말라고 한다. 무엇이 되고자 애쓰지도 말라고 한다. 그냥 지금 이 순간을 느끼고 즐기면서 살자고 한다. 지금 먹은 마음, 지금 품은 생각이 내일을 만든다. 지금 행복할 줄 모르는 사람은 미래에도 행복할 줄 모른다. 그의 마음속에 기쁨과 행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이 되어 행복한 게 아니다. 가능하지도 않고 가치도 없는 그 무엇에 목매지 않는다면 지금 행복하다. 이런 내가 이상주의자라고? 절대 아니다. 난 철저한 현실주의자다. 지금의 삶은 그냥 선택이었을 뿐이다.

※ 이규홍 선생님의 칼럼을 월1회 게재합니다(편집자).
( 편집부 기자    2016년 05월 10일 09시38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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