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전북교육신문칼럼 ‘시선’] 박제원(전주 완산고등학교 경제교사)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이재정이 옳다! 야간자율학습 폐지는 시대적 과제”

-“야간자율학습은 진보와 보수의 쟁점이 될 수 없는 강제적 지배의 문제일 뿐”

-“야간자율학습을 원하는 학생에게는 각 학교나 거점학교를 통해 학교를 개방하면 문제없어”

-“성숙한 진보는 상식적인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

지난 6월 30일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은 고등학교에서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야간자율학습을 2017학년도부터 폐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야만으로부터 해방’으로 학교교육을 정상화시키는 조치라고 했다.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학생이 극소수인 상황에서 야간자율학습을 제도적으로 지속시키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고 했다.

이재정이 옳다. 천개의 고원을 지나도 이재정이 옳다. 진보와 보수의 어떤 스펙트럼을 갖다 비춰도 이재정이 옳다. 고희(古稀)를 지났지만 전임 경기도 교육감 김상곤처럼 담론(談論)과 사변(思辨)을 말하지 않고 상식적이고 대중적인 진보를 추구하는 ‘진짜 진보’라서 이재정이 옳다. 이제는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보편적이며 긍정하는 아침 9시 등교를 맨 처음으로 선언하고 실행한 것도 이재정이다.

야간자율학습 폐지에 대해 교총을 비롯한 몇몇 단체가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야간자율학습은 진보와 보수의 쟁점이 될 수 없다. 진보와 보수의 가치와는 무관한 소수의 강자(그것도 무능한 강자)가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차이를 만들어서 차별하려는 수단이다. 진보와 보수의 껍질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자족하기 위한 술수(術手)와 기만(欺瞞)이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으로 규정하는 것은 진리의 문제라고 볼 수 없는 것을 진리적인가로 환원하려는 거짓 담론일 뿐이다.

브루바허(J. S. Brubacher)나 오타웨이(A. K. C. Ottaway)에 의하면 “교육에서의 보수주의 사상은 기존질서를 유지하는 지식의 전달이다.” 하지만 야간자율학습에 대해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면 야간자율학습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보수적 가치를 전달하고 기여하는 것인지를 설명해야 하는데 그 같은 보수주의자를 본 적이 없다. 더구나 지금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 국어, 영어, 수학, 탐구, 예체능과목들에 대해 온통 보수적 가치를 전달하고 기여하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가?

서구사회와는 특이하게 야간자율학습이 쟁점이 될 수 없음에도 쟁점화되는 현상은 우리 사회의 취약한 사상적 기반 탓이다. 부패한 수구이지만 보수로 위장하고 무능한 공상이지만 진보로 치장하는 아주 은밀하고 뚝심 좋은 치졸한 권력욕망이 유령처럼 이 땅을 배회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허수아비를 세우는 것은 희한한 일은 아니다.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 (David M. Buss)는 그의 저서 ‘이웃집 살인마’에서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 것도, 선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생존하도록 태어났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는 진화 과정에 적응해야 했고, 선이나 악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선과 악이 공진화했으며, 그들에게 살인은 진화적 성공, 즉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라고 주장한다. 작가 정유정은 이를 바탕으로 지난 5월, ‘종의 기원’이라는 신작을 선보였고 상당한 호평을 받고 있다. ‘인간에게 살인은 낯설지 않다.’

그래도 야자에 대해 자비의 원리에 따라 관용의 자세를 가져보자. 지난 10년 전까지만 해도 야간자율학습은 긍정적이었다. 야만적이기는 했어도 대다수의 학부모가 지지했고 현실적으로 대학입학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수단이었다. 수능성적을 가장 중요한 평가요소로 보는 정시입학체제에서 언어, 수리, 외국어, 탐구문제의 객관식 답을 찾는 데는 야간자율학습만한 수단이 없었다. 아무리 사교육에 의존하는 학생이라도 최종병기는 야간자율학습이었다. 상당한 지식을 개략적으로 암기하고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선다형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위해서는 자습시간, 자습환경은 절대적이었다. 또한 고교를 선택하는 학생과 학부모에게는 야간자율학습의 시간과 자습환경의 쾌적성은 중요한 선택 기준이었다. 아무리 비교육적이라고 오장(五臟)을 토하듯이 말해도 귓등으로 흘린 것도, 전국의 일반고에서 성적 우수자들로 심화반(성적우수반)을 편성해 별도의 자습실을 내어주고, 강제적이지만(?) 기숙사에 합숙시켜 자습시간을 늘리려고 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인간답지 못한 제도였지만 그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야자폐지에 대해 공감했지만 대체할 만한 적절한 다른 수단을 찾을 수 없었기에 그 누구라도 쉽게 행동하지 못했다. ‘그 때는 맞다! 살인도 낯설지 않은 진화의 역사에서 자신의 유전자를 잇기 위해서는 사회적 배경도, 정치적 권력도, 경제적 부도 모자란 부모의 입장에서 슬프지만, 야만적이지만, 반교육적이지만 그 때 야자를 했던 것 맞다.’

몇 년 전부터 수시가 대세다. 지금 모든 대학이 수시로 정원의 70% 이상을 선발한다. 학생이 수시에 대응하지 못하면 정시로 원하는 대학을 진학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소설로 변질된 학생부를 주체적, 창의적이라고 미화하는 ‘학생부 종합전형’, 지식의 본질을 궁구(窮究)하기 싫어서 도저히 문제를 해결할 수 문제라고 악의적으로 천대(賤待)하는 ‘논술전형’에 싫든 좋든 대응하지 못하면 꿈꾸는 대학을 갈 수 없다. 전통적인 야간자율학습은 감독교사가 임장한 교실이나 도서관에 학생들을 일률적으로 모아놓고 시간싸움을 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지금의 야자제도는 학생부전형이나 논술전형에 효과적인 대응방식이라고 할 수 없다. 창의적인 체험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고 사고력을 함양하기 위한 독서, 토론, 논술 등을 위한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지 못하게 한다. 더구나 야간자율학습은 자율적이라고 말하지만 기실 강제적이다. 야간자율학습이 각 학교의 학력을 측정하는 지표로서 작용하는 코미디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지금 야자를 하는 것은 틀리다!’

교사의 삶도 우울하다. 야간자율학습 감독교사는 오직 관리라는 명목으로 소란스럽지 않게 하고 졸거나 자는 학생들을 깨워서 자습하게 할 뿐이다. 새로운 지식을 주거나 논리적으로나 창의적인 지적 선도자의 역할을 하지도 않는다. 명색이 고등교육을 받고 지식인이라는 교사가 거의 반강제적으로 시간외 근무까지 하면서 ‘보호’의 업무를 하고 있다. 양육도 아닌 보호의 업무를 한다. 교사는 보호자가 아니다. 그렇게 야자를 해야겠고 감독을 둘 것이라면 차라리 아웃소싱을 해야 한다. 나는 거대하고 엄청난 이념을 말하기 전에 내 삶의 주인이자 지식인으로서 지금과 같은 야간자율학습 감독에 대해 분노하고 반대한다. 그것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돈벌이 이외에는 어떤 답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도 의문이 든다. 경제학적으로 임금과 여가가 대체재인 것을 고려하면 쥐꼬리만 한 시간외 수당을 포기하고 쉬는 것이 합리적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합리적 선택을 하라고 가르치고 배우면서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지금 야자를 하는 것은 틀리다!’

학교 밖을 봐도 야간자율학습 지속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시간외 근무는 시간외에 할 정도로 업무량이 많거나 시간외를 해서라도 일하는 것이 조직에 이익이 될 경우에 하는 일이다. 극단적 효율과 이익을 추구하는 삼성 같은 대자본도 시간외에 대해서 신중하다. 소위 잘 나가는 기업은 시간외를 권장하지 않는다. 비효율적인 기업일수록 장시간 노동에 대해 적극적이다. 자본의 역사는 효율의 역사였으며 노동시간의 단축이 수반되었다. 즉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질수록 장시간 노동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대다수 국가에서는 1일 8시간, 주당 정규근로시간을 40시간을 규정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만 시간외를 하도록 한다. 심지어 스위스나 스웨덴 같은 서구복지국가는 1일 6시간, 주당 30시간의 전면적 상시화를 실험하고 있다. ‘지금 야자를 하는 것은 틀리다!’



그럼에도 한국의 교육환경에서 야간자율학습은 현재진행형이다. 왜 진행하는지, 진행한 후에 결과는 따져보았는지 자료도 없다. 단지 강제적으로라도 야간자율학습을 할수록 잘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며 결과가 좋았다는 것이다. 소문만 있지 실체를 규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야간자율학습이 긍정적이라고 할 수 없는 설득력 있는 자료가 있다. 교육과정평가원은 2015년에 치룬 학업성취도결과를 분석했다. 그 중 주목할 것은 방과 후 수업시간이 학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이다. 학업시간을 늘리면 성적이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가짜였다. 기초학력 상위집단, 기초학력 평균집단, 기초학력 미달집단 모두에게 정규수업 이외에 하루 2시간을 초과해 수업할 경우에 학력수준은 모두 하락했다. 즉 자발적이라고 해도 장시간에다가 획일적으로 이루어지는 학습은 부정적일 수 있다. 도서관에 가두어놓는 방식으로 야간자율학습을 한다고 해서 학력향상을 뒷받침할 수 없다. ‘지금 야자를 하는 것은 틀리다!’

이처럼 야자가 불합리한데도 진행되는 이유는 뭘까? 상상을 해보자. 나는 봉건적 질서의 유지라고 본다. 봉건적이란 낡았다는 것이며 지배적 속성의 잔재라는 의미이다. 야자를 지속적으로 고집하고 야자를 강제하는 것은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하는 관리자 및 집단의 무능에 기인한다고 본다. 경쟁적이라도 더 나은 방식으로 학교를 개선할 수 있는데 그럴 의지와 능력이 없고 기존의 틀을 유지함으로서 질서를 잡고 싶기 때문이다. 질서란 교사, 학부모, 학생을 모두 포함하는 학교라는 구조적 체계의 통제수단이다. 학업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증거를 어떤 식으로든 구성원들에게 보여야 하는데 다른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학생부종합전형이나 논술전형에 대응할 능력이 부재하고 지배적 질서를 유지하고 싶은 탓이다. 학부모들에게는 학생들을 오랫동안 학교에 묶어놓으면 보호까지 하고 있으니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결과는 각자 학생의 몫으로 귀착시키면 된다. 일부 교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야간자율학습감독은 그들의 한계이자 그들이 교육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자기 암시이기도 하다. 칼 마르크스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폭로하면서도 정치적 강제를 없앤 봉건적 잔재의 청산이야말로 자본의 성과라고 불렀다. 더구나 코뮌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봉건적 잔재의 청산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자본주의는 선이자 악이었고 역사적 변증법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낡은 야자를 지속하는 것은 반역사적이다. ‘지금 야자를 하는 것은 틀리다!’

그럼에도 야자를 하고 싶은 학생이 있으면 학교의 도서관을 각 학교나 거점학교를 통해 개방하면 된다. 학교의 도서관을 주민에게까지 개방해서 지역의 문화공간으로 삼자고 하는 마당인데 도서관에서 진짜 야자를 하게 하면 된다. 시설의 파괴와 학생의 충동이 고민이라면 관리담당 직원을 선발해서 감독하도록 하면 된다. 야간자율학습은 시효를 다한 부작용 많은 구시대의 녹슨 칼이다. 그 칼을 휘두르려고 하면 할수록 지배와 무능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누구든지 어떤 이념이나 교육적 소신을 근거로 야간자율학습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수록 자신의 무능을 은밀하고도 수줍게 고백한다고 해석하면 된다. ‘지금 야자를 하는 것은 틀리다!’
획일적, 양적, 사회변화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어떤 교육적 수단도 더 이상 사회를 나아가게 할 수 없는 것이지 보수주의는 사회를 정체시키는 사상이 아니다. 보수주의도 사회발전을 무시하지 않는다. 단지 그 속도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을 뿐이다. 서구에서 진보, 보수 정당이 정권을 교체해도 사회가 크게 변하지 않는 것은 근본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고 단지 속도에 대해서만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야간자율학습 폐지는 마땅하다. 이재정이 옳다. 아침 9시 등교에 이어 야간자율학습 폐지를 주도하는 이재정이 자랑스럽다. 이재정은 사변을 말하지 않는다. 진보가 일상적 삶에서 어떻게 그 가치를 실현하며 진짜 진보가 가야 할 길을 온 몸을 던져 말하고 있다. 지휘관으로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박근혜에 대한 거친 언사보다 낡음을 개혁하고 진보의 값진 대안과 장기적인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다. 일상적인 삶에서 진보든 보수든 대부분이 공감하는 교육적 폐해나 문제를 해결하고 공감하는 대안을 제도로 승화시키고 있다. 아침 9시 등교에 보수가 반대했던가? 지금 야간자율학습폐지는 교육부도 공감한다고 한다. 무엇이 진보인가? 진짜 진보는 어떻게 가야하는가? 나는 이재정이 전라북도 교육감으로 다음에 되었으면 좋겠다.

전임 경기도 교육감 김상곤도 그랬다. 김상곤은 객관식 단답형 사고나 평가의의 문제점을 깨치고 서술형, 논술형 학습에 주력했다. 논술에 대해서 경쟁교육이라는 악의적인 비난에 굴복하지 않고 진보교육이 감당해야 할 문제해결능력을 키우는 학문적 툴(Tool)과 기법(Method)을 교사들이 학습하도록 하고 상당한 분량의 자료로 만들었다. 즉 현실적 욕망을 무시하지 않고 만족시키면서 진짜 진보교육의 기초를 닦고자 했다. 그렇기에 경기도 교육청이 이야기하는 새로운 학력과 전라북도 교육청이 말하는 참 학력(?)이 다른 것이다. 역사와 배경이 다르고 소위 역량이 다른 것이다. 거친 밭에서 비바람에 견디며 자란 야생의 감자와 때깔만 좋게 하려고 구호만 외치는 전북의 무늬만 감자가 어떻게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귤을 가져와서 탱자를 만들어내고 있으면서도 자족에 젖어있는 낡은 진보를 어떻게 수긍할 수 있는가? 지금의 전북교육이 이범선의 단편소설 ‘오발탄’에서 주인공인 송철호가 갈 방향을 모르고 어머니처럼 “가자! 가자!”만을 연발하며 목적지를 잃고 배회하는 것과 비슷한데 무슨 힘으로 맨 주먹을 쥐고 어깨를 걸 수 있겠는가?

진보주의자라면 가장 보수적이어야 한다. 보수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라 보수의 가치에 대해 돌아보라는 의미이다. 성찰은 자신과 다른 타자를 보는 것이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지속적으로 비추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위의 일상적 부조리를 해결하는 것은 진보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다.

“큰 집만 보고 살았더니 작은 집은 집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은 집에 산다. 관리사무소도 없는 작은 집에 살면서 빗물이 새는지, 못이 흔들거리는지 등의 소소한 문제에 더욱 관심이 있다. 60평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정치적 담론을 말하지 않으면 행세티를 내지 못하는 것이라고 여겨서 하찮은 것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탁월한 ‘진보의 맛’은 작은 집의 삶을 돌보는 데에 있다.

지난 유신과 광주학살의 망령이 지배하는 폭압의 시대에 ‘파괴’도 진보의 가치였다. 해체를 검토하기 힘들 정도로 압살의 장벽은 크고 웅장했다. 하지만 이제는 ‘해체’만이 진보다. 파괴는 건설을 염두에 두지 않아 순서 없이 아무거나 부수면 되지만 해체는 다시 복원해야 할 건설의 첫 작업이라 신중하게 기존의 구조를 부숴야 한다. 큰 것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부숴야 한다. 파괴와 해체를 혼동하는 것이야말로 진보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며 진보주의자라면 독단은 파괴를 부르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소통의 장벽과 경청의 부재가 넘쳐나는 전북교육에서 이재정이 그립다. 무엇이 진보이며 어떻게 진보를 확장시킬 수 있는가를 일상적 삶에서 고민하는 그의 혜안(慧眼)이 그리운 것은 나만은 아닐 것이다.

※ 박제원 선생님의 칼럼을 월1회 게재합니다(편집자).
( 편집부 기자    2016년 07월 11일 09시24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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